목록1차/바스티온 M. 핸즈 (36)
Sincero
어린 준위가 드물게 이른 퇴근을 하고 대다수가 정시에 책상을 물린 시간. 방금 해치운 저녁이 채 꺼지지 않아 쌓인 간식거리에도 손길이 가지 않는다. 먹었으니 드러누워 자야하는데 쌓인 종이들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아직은 노닥거리게 두겠지만 조금 지나면 어렴풋이 정해진 저녁 시간도 끝난다. 이 상관은 고지식한 면이 있어 어떨 때에는 직급 높은 준위보다 어렵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던 이가 하사와 눈이 마주치고는 몸을 기울인다. 병장이다. “원사님. 재밌는 이야기 해주시면 안 됩니까?” “나는 이야기에 소질이 없는데.” “그래도요.” 열 살 쯤은 가뿐히 어린 사람이니 귀엽게 보실걸. 누가 그랬더라? 병장 눈이 순식간에 굴러내렸다. 피로에 적셔진 눈 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저로서는 무리였다. 일이 그렇게 밀렸는..
그는 전쟁을 겪은 뭇사람들과 달리 누군가와 닿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꼭 그것처럼 잠자리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무엇을 두려워하기에는 두려운 일들을 많이 겪었고 이제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미지의 것들 뿐이며, 표피로서 사람들은 거의 비슷한 양상을 띄므로 그가 알지 못할 것을 두려워 할 일도 드물다. 다시, 그는 닿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쩌다보니 명줄이 길었고 남의 상처도 제법 돌보게 된 입장에서, 또 의식을 잃거나 물에 절어 더 무거워 진 장정 서넛은 들쳐업고 움직일 수 있는 인력이었다는 점에서, 그는 차차 식어내리는 몸뚱이를 두려워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몸뚱이가 혹여 따뜻한 채로 제 손을 떠나 운송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이 닿았다 떨어지는 그 찰나의 공기가..
네가 아니라 나. 내가 너더러 동생 닮았다는 이야기 한 적 있던가. 대화는 그렇게 뜬금없이 시작된다. 상대는 잠들어있으니 독백이라고 하는 게 맞긴 했다. 펜촉이 잉크병에 퐁, 담겼다 나왔다. 망설임없던 손짓 치고 허공에 떠있는 시간이 길다. 잉크가 방울져 떨어져내리기 전에 펜촉이 다시 병 안으로 들어갔다. 끝을 다듬어 방울지지 않을 정도로 덜어내고서도 침묵은 길다. 탁, 그는 가볍게 손끝을 튕긴다. 스치는 정도라 작고 탁한 소리가 난다. 반쯤 책상을 향했던 몸을 다시 튼다. 등받이에 턱을 걸친 불량한 자세이나 당신이라면 이걸 더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구석에 콕 박힌 몸. 웅크린 모양새. 그는 어렵지 않게 어느 여름날의 구석방을 떠올린다. 안그래도 작은 몸이 더 작게 구겨들던 시간들. 그 애는 인간의 몸으..
오빠, 오빠. 자? 바스티온, 자냐구. 오빠, 진짜 자? 오빠아. 말 끝이 늘어진다. 문 밖에서 발 구르는 소리가 조금 더 급해지고나서야 바스티온은 몸을 일으켰다. 발에 걸려 늘어지는 이불을 걷어내고 바닥으로 꺼질 것 같은 몸을 걸음마다 끌어올리며 문을 연다. 허리에나 겨우 오는 다섯살짜리 꼬마애가 이렇게 올려다봤다. 꼭 붙드는 손에 팔 한 짝을 내어주곤 작은 머리통을 끌어안는다. 새는 하품을 숨보다 짧게 끊었다. 잠이 안 와? .... 들어와서 잘래? 오빠 방 더러워서 싫어. 조막만한 입으로 아주 또박또박. 그럼 내려가자. 발치에 걸리던 이불 말고는 아무것도 없이 말끔한 바닥을 그는 언급도 하지 않는다. 작고 따끈한 손은 쉽게 쥐여주지도 않는다. 손보다는 팔뚝이나 그 옷자락 쯤이 더 좋은 모양이었다. ..
발등의 관통상.. 갑판 아래에서 찌른 검에 뚫림 (전쟁 2년차) 다리의 절상.. 다른 사람이 칼 맞을 뻔 한 거 (맞을 뻔 한 사람을) 걷어차고 궤적 못 피해서 맞음 (전쟁 1년차) 다리의 관통상(총).. 마스트에서 쏜 걸 그나마 몸 젖혀 피해서 다리 맞음 (전쟁 1년차) 얼굴 파편에 입은 절상.. 도끼에 부서진 파편 튀는 거 다른 사람 안 맞게 누르다가 자긴 이마 찢어졌어요 (전쟁 2년차) 얼굴 칼에 입은 절상.. 밑에서 베어올리는 거 직격으로 맞을 뻔 한 사람 몸으로 밀쳤다가 자긴 얼굴 베임 (전쟁 1년차) 하씨 쓰다보니 이거 뭐 희생에 미친 사람같네 아니에요 그냥 남 구할 때 말고는 상처 생길 일이 별로 없었어서 그래요 얼굴 자상.. 눈 파일 뻔 했음 얘 몸에 흔치 않은 완벽히 본인 때문에 생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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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 없으면 시체꼴로, 그렇게 평생 살거야? 사람처럼 살 정도만 생각하랬더니 무덤 파고 누울 정도로 생각할거냐고. 모르겠으면 물어봐! 내가 말해줄게. 혼자 멍청한 짓 하지 마. 알겠어? 튀면 죽어! 알겠냐고.” 그것은 성을 세우는 과정이었다. 거기서 기다려. 그래서 기다렸다. 차근차근 돌이 쌓아올려지는 모습을 보며, 그 높이가 제 눈보다 높아져 성벽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에도 기다렸다. 견딜 수 없을 때에는 목소리를 떠올렸다. 혼자 멍청한 짓 하지 마. 알겠어? 알겠어. 중얼이면서.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가지 않을 것이다. 도망치는 것을 끝끝내 잡아끌어 되돌아 앉혀놓았잖나. 하지만 혹여, 버리고 간대도 어쩔텐가? 이 성벽이, 사실은 성벽이 아니라 감옥이라도 뭐, 감히 어쩔텐가? 오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