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o
From. 차 연 본문
흰 봉투 안에 편지지 몇 장이 들어있다.
Dear. 미시
아직 지구에 있나요? 우선 좋은 소식으로, 미시의 편지를 혼자 읽어도 될 정도의 시간은 지났어요. 그러니까 애수는 전부 내 것이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축하를 보내오고 있다는 뜻이죠. 퇴원을 했다면 미시를 보러 가고 싶었을텐데 유감입니다. 퇴원은 이제 아주 요원하지는 않지만 회복세는 내 생각보다 더딘 것 같아요. 퇴원을 한대도 활과는 아주 작별일 것 같고요. 감으로 어떻게 안 될까요? 내가 해 온 게 얼만데.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혹시 나 있는 근처에 오더라도 방문은 말아주세요. 고맙습니다.
( 거침없이, 그보다는 다소 거칠게 이어지던 글은 다음 줄부터는 제법 정돈되어 있다. 글자 크기도 약간 다르다. )
하지만 미시한테 잘못이 있는 건 아니니까 너무 쌀쌀맞게 굴지는 않기로 정했어요. 근처에 온대도 내게 알리지만 말아주세요. 같은 지구에 있다고 해도 이 행성이 그렇게까지 작은 건 아니니 내가 있는 병실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요. 나를 현실에서 떼어놔주던 게 현실이랑 맞닿아버리니까 별로 즐겁진 않아요. 미시를 무슨 도피처 취급해서 미안해요. 나만 힘든 것도 아닌데.
그러고보니 미시는 그쪽 우주는 아주 두고 오기로 한거예요? 이쪽 우주에서 살아도 괜찮지 않나요? 해치를 닫을 수 있다면 이쪽이랑 그쪽이 연결될 일도 없고, 전염병이 넘어올 일도 없고, 미시도 생명이 없는 곳에 남는 것보단 뭐라도 있는 쪽이 즐거울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아닐 것 같기도 하네요. 뭐라도 있는 게 외려 좀 짜증나지 않나요? 아니라면 다행이고요. 다행인가요?) 상상이 즐거웠다가도 금세 즐겁지 않아지네요. 방금은 미시가 전에 그려줬던 함선을 생각 중이었거든요. 그게 저기 하늘 어디에 떠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별로 재미 없어요. 이러다 정말로 천문학자 같은 걸로 진로를 틀게 될 것 같아요. 지금이야 생각하고있는 진로랄 것도 없지만요. 아니면 용접공같은 것도 괜찮겠죠. 우주선을 만드는거예요. 이쪽이 더 보람찰 것 같기도 하네요. 아마 우주비행사는 못 될테니까. 수술 경험이 있으면 안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네.
다른 얘기 할래요. 미시, 구름 사이 볕. 생각해보니까 내 이름도 그런 식이긴 하더라고요. 우리는 가족 이름은 이름 해석에 안 넣긴 하지만요. 내 가족 이름, 차는 탈 것을 뜻해요. 내 이름, 연은 꽃의 한 종류고요. 그래서 내 이름은 풀어쓰면 연꽃이 돼요. 보통은 이름을 성 빼고 두 글자로 지어서 올곧고 올바른, 빛나고 강한, 밝은 빛, 뭐 이런 식이 되는데 내 이름은 외자라서 수식어가 따로 없는 연꽃이에요. 연꽃은 얕은 저수지같은 곳에서 피는 꽃이에요. 저수지는 물을 의도적으로 모아두는 인공 호수같은거고요. 꽃과 잎은 물 위에 동실동실 떠 있고 뿌리는 물 아래의 진흙에 박혀있어요. 꽃이 굉장히 예뻐요. 꽃잎이 여러 겹 겹쳐있어서 한 송이만으로도 풍성해보이거든요. 꽃다발 받는 것도 좋아하긴 하는데, 어릴 때는 그런 꽃 구경하는 걸 더 좋아했어요. 저수지에 들어가서 그 꽃 한 송이를 양손 가득 받쳐들고 나오는 상상을 했었죠. 깊은 물에 들어가 본 것도 굉장히 오래됐네요. 밤의 저수지는 확실히 어린애 혼자 가게 두기엔 위험한 곳이긴 해요. 물귀신도 그렇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이래저래 그렇죠. 어릴 때 왜 그렇게 혼났는지 알겠네요. 반성.
하나 궁금한 건, 미시는 우리 종족을 봤을테니까, 눈이 달린 위치가 어떻게 다르던가요? 막연히 우리들 눈 위치 비슷하게 네 개가 네모낳게 붙어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닐지도 모르겠다 싶어져서요. 그림으로 그려주면 안 돼요? 저번에 보니까 그림 잘 그리던데.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럼 전 슬프긴 하겠지만 인공 눈물을 절약할 수 있겠네요.)
2037년 3월 27일
지구, 대한민국, 서울. 車 蓮.
p.s. 한자도 해석이 되나요? 차 연. 이라고 썼어요. 나는 개인적으로 연 글씨 안에 차가 들어있는 게 좀 귀여운 것 같아요.
p.s.2 여전히 미시를 꼴도보기 싫은 건 아니예요. 편지가 늦어진대도 그럴 일은 없어요! 그 점은 걱정 말길.
p.s.3 인공 눈물 얘기는 약간의 농담이었는데, 이게 이해가 가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드네요. 별 거 아니에요. 무시해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