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o
From. 차 연 본문
흰 봉투 안에 편지지 몇 장이 들어있다.
겉봉에 쓰인 글씨는 아주 느리게 쓴 듯 꾹꾹 눌러 적혀있다.
Dear. 바다 테르미스
안녕하세요, 구름 사이 볕. 좋은 저녁입니다. (그러고보니 거기서는 날짜를 어떻게 세나요? 우리는 수평선 위로 해가 뜨고 지는 걸 하루의 기준으로 삼아요. 지금은 해가 지는 중이에요.)
보낸 편지 이후에 이어서 쓰고 있습니다. 나에 대한 몇 가지는 이미 답했으니 다른 것들에 대해서 얘기해볼게요. 미시의 무료함(바쁜 것 같으니까 무료한지는 모르겠지만)을 달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생각해봤는데, 물론 나는 꽤 예의바른 아이고(정말이에요) 예의바른 학생은 남의 상처를 후벼파지 않는 법이지만, 글쎄요. 아직까지는 미시의 이야기가 아주 멀리 느껴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제가 심심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마주보고 대화하는 게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르죠. 아, 저는 눈도 귀도 꽤 좋은 편이었어요. 시력이 떨어져 갈 즈음에는 귀가 더 좋았던 것 같고요. 그래서 남들 목소리 톤으로도 금방 감정 변화를 알아챌 수 있거든요. 하지만 미시는 지금 앞에 없으니까. 게다가 처음의 몇 편지는 가족의 목소리로 들었잖아요. 그다지 심각하게 느껴지지도 않았을뿐더러 동화같은 느낌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돌이켜보니 미시의 무던함에 감사해야 할 일인 건 맞는 것 같아요. (지금 사과를 해야할 지 고민 중이에요. 먼발치의 일로 봐달라고 했잖아요. 무례한 구석이 있었다는 생각은 하고 있단 걸 알아주세요.)
행성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궁금해요. 테르마임의 바다라고 하면 어쩐지 물이 많을 것 같은 인상이 있잖아요. 우물이라고 불리는 것도 그렇고요. 네, 맞아요. 지구에도 바다가 있어요. 파도와 수류를 말씀하시는 거 보니 같은 종류의 바다인 것 같고요. 그런데 왜 우물인가요? 우물이 어떻게 멸칭이 돼요? 또 생각해봤는데, 무례하단 건 알지만 묻는 데에는 지금 아니면 물어볼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인 것도 있나봐요. 우리가 오래 볼 사이였다면 충분히 친해진 뒤에, 충분히 조심스럽게 물었을거예요. 정말이에요. 나 예의바르다니까요. 상냥하기도 하고요. (정말로요!) 그리고 더불어, 왜 남의 언어에 관심이 없을까요? 음성 체계가 비슷해서? 그런 게 아니어도 소통이 가능해서? 우주에는 바벨탑이 없으니까? 우리는 한 행성에서도 여러가지 언어를 사용해요. 국경이 나뉘어있고 국가마다 정부가 있죠. 사람은, 그러게요. 65억? 60억? 얼마 전에 곧 몇십 몇억대가 뚫린다는 얘길 들은 것 같은데 정확하지 않아요. 이것도 위로가 됐을까요? 지구 밖에 외계인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보니 있겠네요.) 지구 안에는 그 정도 사람이 있고, 동식물까지 포함한다면 생명이 그것보단 훨씬 많을 거예요. 해도 뜨고 달도 뜨고, 구름에선 천둥 번개와 비가 쏟아지고, 별도 보이고…. 적다보니 내가 날씨 같은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 같네요. 바람도 불어요. 활을 쏠 때는 그게 가장 중요하긴 했죠.
적을만큼은 다 적은 것 같아요! 참고로 가족을 지인이라고 칭한 건, 미시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약간의 필터링을 건 결과에요. 부모님이 바쁘셔서 둘이 번갈아가며 내 보호자 역할을 해 주고 있고, 둘 다 완전 다 큰 성인이랍니다. 조카도 있어요. 걔는 날 별로 안 좋아하지만 귀여워요. 미시도 가족이 있었나요?
(줄 맞춰 이어지던 편지는 두 장 째 중간 언저리에서 끊긴다. 다음 장부터는 다시 줄 간격이 들쑥날쑥 하다. 오른쪽으로 쳐져 떨어지는 줄.)
답장 고맙습니다, 미시. 이번 편지는 형수가 읽어줬어요. 왜냐하면 눈 사용 금지령을 받았거든요. 저번 편지를 너무 집중해서 읽었더니 답장이 돌아오는 동안 받은 검사 때 담당의께 좀 혼났어요. 회복세라는 건 말 그대로 회복세인거지 회복 완료가 아니라고 하시면서요. 주변을 둘러보는 건 괜찮지만 밝은 빛을 보는 건 안 좋고, 눈을 혹사시키는 것도 안 좋대요. (사실 전에 다 들었던 얘기긴 해요. 가족들한테도 충분히 혼났어요. 그래서 형이랑 누나한테는 차마 편지 읽어달라고 못하겠더라고요.) 무슨 전투함같은 그림을 그려줬다면서요? 나중에 눈이 좀 더 낫게되면 천천히 살펴볼게요.
드라칸은 전투 종족이거나 지도자가 아주 욕심이 많았던 것 같네요. 이번엔 맞나요? 아니면 죽고 싶어서 아주 안달이 났던가…. 그런데 미시, 내가 또 사과해야 할 질문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우주에 미시 혼자 남았다면 이제 도망자는 아닌 거 아니에요? 동족들을 찾아나설 필요가 있나요? 그 전염병이란 게 바다 테르미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건 아니고 미시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은 거 아닐까요? 사실 영향을 미쳤는데 아직 모르고 있는 건요? 아, 그리고. 멸균 시스템이 있는데 드라칸도 전염병에 걸려 사라진거예요?
흠. 예의바르단 말은 철회해야 할 것 같아요. 나보다 사회 경험 많고 어른인 구름 사이 볕이 양해해주세요.
물어볼 게 많으니 생각해 볼 것도 많고 좋네요. 남의 이야기 듣는 건 즐거운 일인 것 같아요. 이것도 좀 무례했던 것 같네. (하지만 즐거워하는 걸 사과하려면 미시의 상황을 불행이라고 정의해야하니 사과하진 않을게요. 사과가 필요하다면 말해주세요. 언제든 준비되어 있어요.)
답장 기다릴게요.
예의 있는건지 없는건지 알 수 없는,
차 연.
p.s. 그러고보니 답장할만한 거리가 있게 썼나요? 질문은 많이 한 것 같으니까 괜찮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니라면 미안해요. 그래도 답장 주세요. :)
p.s. 2 형수가 무슨 감사 인사 하겠다고 얼굴 한 번 뵙고싶대요. 쪽지 확인 부탁해요! 나도 보고싶은지는 잘 모르겠어요. (미시를 꼴도 보기 싫단 건 절대 아니에요.)
편지 가장 마지막 장의 뒤에 포스트잇이 하나 붙어있다. 다른 필체가 정갈하다.
위에서 두 번째 문단은 건너뛰고 읽어줬어요.
연이는 아직 꿈에 미련이 좀 남은 것 같아서, 눈이나 활에 대한 얘기는 우리도 살짝 피하고 있거든요.
병원은 눈 때문에 입원했던거냐고 적혀있다는 말은 전했어요.
어떤 분인지는 모르지만 말동무가 되어줘서 고맙습니다. 애가 어른스러워서 우리한테는 투정도 속내 얘기도 잘 안 해요.
병원에 계신 분인 것 같은데, 차후에 기회가 되면 한 번 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 연이 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