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o
[흰 편지 봉투] 본문
봉투 한구석에 ‘늦어져서 미안해요. 그런데 이 편지가 “늦는” 일이 있을까요?’ 라는 글이 적혀있다.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길게 두 번 접힌 편지지가 든 봉투. 두툼하다. 이전의 편지가 함께 들어있다.
여전한 악필.
Dear. 침대 여행자
침대 여행자가 아니라는 것까진 알았지만 이게 귀여우니까 이렇게 쓸게요. 미시! 저는 구름 사이 볕이 더 좋아요. 미시가 간편하고, 침대 여행자가 귀엽지만, 구름 사이 볕이라는 이름은 따스한 구석이 있잖아요.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알 수 없는 편지가 오가고 있으니 무슨 말이 오더라도 그러려니 할 수 있겠지만, 사실 지금은 이게 다 내 가족들의 연극이 아닌가 싶어요. 지인은 가족입니다. 친구들도 오긴 하는데 편지 발견은 늘 가족들이 하니까 합당한 의심이죠? (참, 적는 걸 잊은 것 같은데 이 종이도 되돌려줄거라면 이번 문단부터는 지워서 회신 바랍니다. 저번처럼요. (그러고보니 가족들의 연극이라면 이런 부탁도 쓸모없는 일이긴 하겠네요. 아무튼.)) 하지만 아닐 경우, 구름 사이 볕(사실 이 호칭도 귀여운 것 같아요.)의 존재를 의심하는 건 무례가 될테니 그냥 믿어보려고 해요. 나 사는 곳에서는 생각 못 할 일들이 많이 적혀 있어서 형한테 편지를 네 번 정도 다시 읽어달라고 했어요. 누나한테는 두 번이요. (그러니까 둘이 아니라 셋인거죠.) 그래도 답장은 기억에 의존해 쓰는거니까 틀린 내용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세요.
구름 사이 볕은 외계인이군요! 눈이 아홉 개 이상 달린 외계인이거나 남의 눈을 뽑아 보관하는 외계인인거죠. 저는 전자였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구름도, 해도 있는 곳 출신이거나 거기에 뿌리가 있는 외계인이고요. 미시에게는 내가 외계인이겠지만요. 나는 눈 두 개, 팔 두 개, 다리 두 개, 몸통 하나, 심장 하나, 내장이 몇 개 있고 입이랑 코랑 귀랑 혀랑 이랑…. 그런 게 있는 외계인이에요. 여기는 2037년 1월 13일의 지구, 대한민국이에요. 순서대로 행성, 나라 이름이고요. 이름은, 빈칸이 있다고 하던데 내가 빈칸을 볼 수가 없어서 그냥 여기다 적어요. 내 이름은 차 연 입니다. ‘차’가 가족 이름이고 ‘연’이 내 이름이에요. 그러고보니 구름 사이 볕은 가족이나 종족 이름은 따로 없나요? 이런, 쓰다보니 생각난 건데 도망자라고 하지 않았어요? 아홉 개의 여분 눈은 역시 남의 거였나요? 전쟁 종족인가요? 아니면 그 비슷한 사유로 멸족당했나요? 미시가 내 행성의 이름을 알게된다면 여기까지 올 수도 있을까요? 왜, 번역기가 내 모국어까지 번역할 수 있다는 건 어떤 교류는 가능하다는거고, 미시는 거취가 명확하지 않은 여행자 내지는 도망자인 것 같으니 갈 수 있는 모든 곳에 갈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아래로는 한참 공백이 남았으나 편지는 거기서 끊긴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 이어진다.)
안 보일 때 쓰는 편지라는 건 정말 성가신 일이네요. 전에 무슨 내용을 썼는지 기억이 잘 안 나요. 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던 것 같은데 누구한테 확인 해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무슨 검사가 어떻다고 해서 잠시 다녀왔거든요. 막힘없이 신나게 쓰고 있었던 것만 기억나요. 뭘 묻고싶었더라. 미시가 이전 편지에서 말해 준 것 중에 내가 언급 안 한 게 있으면 한 번 더 말해주면 고맙겠습니다. 가족들한테 그 편지를 또 읽어달라고 했다가는 둘 중 어느 쪽이건 딱밤을 때릴 것 같아서요. 둘 다 손 힘이 진짜 좋거든요. 엄청 아파요. 내가 환자라서 세게 때리진 않을테지만.
p.s. 눈을 보내 줄 필요는 아직 없어보입니다. 회복은 나쁘지 않게 되어가고 있다고 하고, 그걸 받는대도 내 시신경과 연결할 방법을 나는 모르니까요. 더불어! 그게 어디서 났냐고 묻는 사람들의 말에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p.s. 2 구름 사이 볕은 학자는 아닌가요? 기록 자체에는 별로 관심이 없나 해서요.
p.s. 3 계속 늘어나네요. 그럼 처음에 그 행성에는 왜 간거예요? 그 작지만 별 일 없으면 부숴질 일도 없는 장서고에요.
그리고 저도 펜팔은 거의 처음이니 걱정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다음 진료를 기다리며,
차 연
봉투 안에 함께 든 이전 편지의 빈칸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았다. 다소 거칠게 다뤄진 듯 면이 조금 구겨져 있다.
편지는 역시나 악필이다. 용케도 길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