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o

From. 연꽃 본문

1차/7일의 편지

From. 연꽃

윤라우 2024. 2. 3. 04:52

흰 봉투 안에 종이 몇 장이 들어있다.


Dear. 얼음 여행자


축하합니다! 나 정말 잘 안 울거든요. 미시의 업적 중 하나로 일기장에 적어두어도 좋아요. 내가 아주 오열을 하는 바람에 가족들이랑 같은 병실 사람들이랑 담당 간호사 선생님까지 전부 호출해버리게 한 그 사태의 남모를 원인으로서 말이에요. 그 사람들은 내가 참고 참아온 서러움이 폭발한 줄로 알아요. 아무렴 내가 알고지내던 외계인이 보낸 편지가 나를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외롭게 해서 울었다고 말 할 순 없잖아요. 그럼 나는 이 병원에서 퇴원한대도 곧장 다른 병원으로 보내졌을거예요. 그래봤자 우주 기준의 좌표로 치면 눈치도 못 챌 만큼 조금 옆으로 옮겨간 정도겠지만요.
하지만, 미시. 나는 왜 항상 모든 것들을 이렇게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잃어야만 할까요? 왜 나는 항상 갖지 못할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정해진 이별을 향해 걸음을 내딛어야 할까요? 이게 내가 가진 낙관에 내려지는 벌일까요? 어떻게 되겠지 싶어서 외면하고 있으면 그렇게 좋아해도 어차피 이건 네 게 아니야, 하고 빼앗아가는 게 이 우주가 내게 내리는 선고인걸까요? 그래서 모든 건 화살과도 같이 내 손에 잡힌 적도 없는 것처럼 쏜살같이 떠나가고 과녁에 꽂힘과 동시에 스스로의 역할을 다하고 만족해버리는데 나는 사대에 끝도없이 서서 이미 나를 떠난 영광을 바라보기만 해야하는걸까요? 미시, 활을 쏴본 적 있어요? 중앙을 뚫었을 때의 만족감에 취해선 안 되고 다음을 위해 마음을 가다듬어야하는 일은 잔인해요. 하지만 그래요, 솔직히 나는 그게 가장 좋았어요. 다음이 있는 일이 좋았다고요. 활을 당길 때의 긴장감, 그걸 놓쳤을 때의 탈력감, 그러나 다음이 있다는 기대감.... 그런데 내게 그 다음이 없다잖아요. 가늠을 못 해 살이 과녁에 닿지 않으면 이별은 어떤 식으로 해야해요? 미진하게 남은 불쾌감은 어쩌고요? 영원히 잘 이별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직감은 내 인생에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고요. 미시. 그래서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외롭다고요. 나 지금 내 우주 뿐만 아니라 미시의 우주에게도 선고받은거라고요. 너는 영원히 잘 작별하는 일 따위는 할 수 없다고 선언당한거라고요. 너무 속상해요. 서러워요. 비참하진 않아요. 엄청 슬퍼요. 미시가 옆에 있었으면 내가 닷새 동안 엉엉 우는 걸 보여주고 싶을만큼요. 내가 엄청 서럽게 울면 죄책감은 좀 느낄 것 같아요? 미시도 나만큼 속상했으면 좋겠어요. 짜증나요! 남한테 휘둘리다니 최악이에요. 내가 드디어 내 감정 쪼가리도 제대로 통제 못 하는 인간이 됐군요. 사대에서 들인 습관들은 티끌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게 되었어요. 활잡이에서 아주 멀어지고 있단 말이고요.
그리고 정말로, 나는 아직도 나를 연민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준비가 안 됐어요. 내 하나뿐인 도피처께서도 나를 그렇게 대할까봐 무서워요. 어차피 미시 입장에서는 잘 보이건 아니건간에 눈이 꼴랑 두 개 달린 녀석들은 다 비슷비슷하게 덜 되어보이겠지만 그거랑은 상관 없어요. 기분상의 문제예요.
쓸 수록 새롭게 열받아. 바보! 미시는 바보예요. 편지지 전부 다 돌려주세요. 책으로 낼거예요. 그리고 작가로 성공해서 미시를 창작물로 다뤄버릴거라고요. 괘씸해요. 활자로 박제할거야. 어떻게 성공할거냐고 걱정하지 마세요. 사람들은 가쉽을 엄청 좋아하거든요. 추락한 유망주의 불쌍한 시절 상상친구 이야기라고 하면 그 꼬락서니 구경하기 위해서 책을 살 사람들이 한 트럭은 있다고 장담할 수 있어요. 게다가 그 전에 미시를 엄청 탓할거예요. 당연하지만 미시는 나를 엄청 모르는군요. 엄청나게 탓할거라고요. 나는 미시를 친구처럼 생각하고 있었는데 미시는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한거예요? 심심해서 종이나 붙들고 있는 할 일 없는 지구인? 나를 그저 호기심어린 웬 이방인으로 대할거였다면 내게 작별을 말해서는 안 됐어요. 당신이 바로 그 단어를 말한 탓에 나는 지금 눈물을 한바가지 쏟고, 그 이유가 아닌데도 활 정도는 못 쏴도 괜찮다는 위로를 듣는 탓에 활에 대해 생각하느라 눈물을 또 한바가지 쏟고, 위로를 받아야하는 입장인 게 억울해서 또 한바가지, 그 와중에 날 이렇게까지 울게 한 당사자는 이 사태에 책임도 지지 않을거라는 사실이 억울해서 또 한바가지를 쏟은거라고요. 지금 또 울컥했어요. 당신 몸의 수분은 중요하고 내 몸의 수분은 어떻게되든 알 바가 아니란건가요? 이렇게 짜증내다보면 당장 와서 나랑 악수하고 포옹도 하고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하고 가라고 할 것 같으니까 그만 짜증내야하는데. 사람은 열받으면 충동적이 된다고요. 나도 알아요. 그런데 써놓고보니까 이게 꽤 괜찮은 생각 같아서 진짜 큰일이네요. 

진짜 괜찮은 생각 같아서 정말 엄청나게 큰일이에요. 밥 먹고 올게요. 울었더니 배고파요. 더불어 연꽃은 먹을 게 그다지 없고 연잎, 연꽃 뿌리, 연꽃 줄기는 식용으로 써요.

 

연꽃. (식용 아님)

 

p.s.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은 안 되겠고 두 달 쯤 후까지 살아남아보세요. 얼굴 보고 출판 관련 저작권 합의 봐야겠어요.
p.s.2 그 새는 펭귄이에요. 난 먹어본 적은 없지만.
p.s.3 두 달 못 버티겠으면 답장에는 작별을 고해주세요. 미진한 이별이 선고가 될 정도로 나한테 미시는 현실이니까.
p.s.4 미시가 굶어죽으면 어떡하지....


편지지는 세 장으로, 앞의 두 장은 흰 바탕에 줄이 있는 일반 편지지.
발송인과 p.s.가 적힌 종이는 편지지와 같은 크기의 세계지도 뒷면이다.
한국, 서울 언저리에 빨간 점이 찍혀있다. 덧붙은 포스트잇에는 어딘가의 주소가 적혔다.

'1차 > 7일의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From. 차 연  (0) 2024.02.03
From. 차 연  (0) 2023.12.12
From. 차 연  (0) 2023.12.10
[흰 편지 봉투]  (0) 2023.12.10
비밀 편지  (0) 2023.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