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o

제롬 어니스트에게. 본문

1차/바스티온 M. 핸즈

제롬 어니스트에게.

윤라우 2022. 5. 18. 19:15

생각은 길다. 바스티온은 무감해보일 뿐 무감한 사람이 아니고, 미련해보일 뿐 미련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단서만 주어지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유추해내는 사내였다. 제 주변을 둘러싼 많은 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했으므로 굳이 따지자면 제롬의 속내를 알고도 제롬에게 가장 크게 흔들릴 사람이 그였다. 남의 기분을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이 가장 휩쓸리기 쉽다. 그러므로 그 10초 가량, 제롬이 자신을 내보이기 전의 공백동안 그는 제롬의 기분이 상했음을 안다.

 

바스티온은 기다린다. 새초롬한 시선, 풀 죽은 듯 음식 뒤적이는 손길, 억지 웃음과 반만 차린 예의가 담긴 작별인사. 당신의 위상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그 모든 것이 꾸며내 졌다는 사실도 알기 쉽다. 상관이 가게를 나서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주인장과 눈이 마주친다. 바스티온은 난처한 얼굴로 웃는다. 그래도 맛 트집은 않으셨으니 마음에 드셨나봐. 걱정스러운 시선은 가시지 않는다. 이번에야말로 잘리는 거 아니야? 헛웃음. 무서운 소리 마라. 다음에 또 올게. 계산 후에, 그는 대놓고 삐진 티를 내며 자리를 파한 상관을 찾아 걸음을 옮긴다.

 

바스티온이 제 눈앞에 내보여진 모든 종류의 갓 난 상처-만들어진 것일지언정-를 어떤 방식으로도 피해가지 못 하는 성정인 것은 차지하고, 제롬. 닿을 일 가장 없는 사람이 시선을 둔 이유야 알만하다. 늘상 가면 비슷한 것을 쓰고 온통 머리를 굴리며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 염증이 났으리라. 우직해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못내 손에 넣고 싶어하는 것이다. 한 두번도 아니다. 바스티온은 그런 사람들이 염증난 것이 상류 사회 그 자체인지, 본인 스스로들인지 알 수 없었다. 영영 알 일 없는 세계기도 했다. 그는, 우선. 이만큼조차도 생각을 하기가 싫었다.

 

그러므로 바스티온은 쉽게 고개를 숙인다. 꺾여보인다. 휘둘린다. 흥미를 잃도록. 애초에 그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니므로. 같은 세월, 훨씬 높은 자리에 오른 이들이 있다. 대체 제 어떤 부분에 탐을 낼 가치가 있나? 인재라고 판단해 마땅한 것에만 손을 뻗어라, 제발.

 

중위님의 쓸모를 하필 이런 곳에서 찾으실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말하지 않는다. 그 능력의 증명은 이런 곳보다 다른 곳에서 더 유용할 것이며, 제 눈에 당신이 쓸모있어봤자 그것은 아무 효용을 갖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대신 변명만을 뱉는다.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단어 고르는 게 매끄럽지 못합니다. 감히 요구할 수 있다는 게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사람이 미련해 남의 줄 타고 오르는 것도 잘 하지 못합니다. 그것 외에는 떠오르는 것도 없습니다.”

 

지친 얼굴. 비위 맞추느라 애 쓰고 있다는 것을, 당신 뜻대로 쉬이 휘둘릴 것임을 보인다. 말주변 없고 눈치 느린 사람이 당신을 위해 이만큼 노력하고 있으니, 당신 행보도 무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 말하듯이. 사실 그 자체이니 딱히 꾸며낸 것도 아니다.

 

“차라리 보기라도 주신다면 쉽겠습니다.”


원하는 것을 말해라. 지긋지긋했다. 그는 원하는 것이 없었다. 잃기 싫은 것이라면 몰라도.

'1차 > 바스티온 M. 핸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명하시겠습니까.  (0) 2022.05.18
제가 선물 받아달라고 조르는 것 같지 않습니까?  (0) 2022.05.18
장점이라 하면,  (0) 2022.05.18
야!  (0) 2022.05.18
육지에 내린 닻  (0) 2022.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