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o
To. 이든 R. 블레이크 본문
Unsent
끝내 조각만은 담아.
밤입니다. 로잘리. 오늘 야간 배치거든요. 달이 훤하네요.
들어본 적 있습니까? 우리가 같은 달을 볼 수 있는 날이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남았겠냐는 말 말입니다. 전쟁 중에는 매일 밤마다 동료들과 그런 얘기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반쯤은 자조섞인 농이었습니다만 그 때 주변 자리 꿰찬 이들 소중히 하는 티를 내기로는 그만한 말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바다에서 죽으면 호상이라던 녀석들을 죄다 육지로 당겨올리겠다는 소리를 해대던 것도 벌써 십 년이 훨씬 넘게 지났습니다. 다행히 그 문장은 전쟁터에 고이는 일 없이 제법 흘렀습니다. 그건 이제 우리 얼굴 좀 자주 보자는 뜻으로, 지금 곁에서 달 같이 보는 이가 소중하다는 말로 자리매겼습니다. 문득 옛 뜻이 떠오르긴 합니다만 웃음으로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들입니다.
같은 달을 보고 감탄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더 있을까요. 같은 풍경을 누리고 감각하는 일이 한없이 귀합니다. 그런데 로잘리. 온전히 같은 것을 누리지 않아도 같은 하늘 아래에 놓여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을 다잡게 되는 생을 아십니까. 붉은 빛 품기만 해도 여럿 긴장하게 만들고 산 사람 잡아먹은 바다가, 죽은 사람 삼키며 성나 일어나던 파도가, 달빛이 비춰내려도 결국에는 검은 이 바다가 지금 당장 내 목숨 잡아챌 수 있음을 알면서도 채 두렵지 못한 생 말입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색도 기어이 숨 막지 못하고 느리고 깊은 호흡 하게 하는, 그러니까 바다가 영영 검더라도 그 바다 덮은 하늘이 나뿐 아니라 당신 위에도 드리워져 있으리라 짐작하면 결코 두려울 수는 없는 생이요.
감히 추측하건데 당신이 보는 바다란 꼭 이런 색일 것이라 나는 검은 바다를 두려워 할 수 없고….
우습지 않습니까.
…우습지 않습니까.
생각에 열중하는 일이 기꺼울 줄을, 전쟁 때의 내가 알았겠습니까? 또, 남의 눈을 통해 바다를 어림하는 일이 있을 줄을 그 때의 내가 알았겠습니까? 웃으셔도 됩니다. 저도 좀 웃는 중입니다. 검은 바다를 두려워 할 수 없다니. 호기심이 나를 죽일겁니다. 검은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는 골 빈 녀석이 그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들에 목숨 잃는 일은 허다하지 않습니까. 그 검은 바다를 눈 앞에 두고도 여전히 딴 생각에 열중하는 머저리는 또 어떻고요.
요즘에는 가끔 자주 그럽니다. 온갖 군데에서 당신을 떠올리는 일 말입니다. 그것이 크게 죄스럽지 않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왜, 전에는 당신이 그냥.
이런저런 관계들을 어려워하기도 했고.
글쎄요. 그런 것들이 핑계 같기도 하긴 한데.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최근에는 당신이 제법, 당신 일상에 내가 들어있는 것처럼 굴곤 해서. 아마 그래서….
무얼 보더라도 당신 생각이 먼저 나고, 그래서….
그러니까, 이런저런 제안들에 당신이 휘둘려줄 것처럼.
그러지 않았던가요. 이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 핑계이고 착각인가?
어쩌면 당신이 나를 제법 가족…같이, 대하고. 그런 것을 별로 어려워하지 않는 것 같아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내가 가족한테는 바라는 게 좀 많기도 하고요. 압니다. 재밌었던거나 좋았던 건 한 번씩 쥐어줘보고싶고, 반응도 궁금하고, 그런 걸 가족 아닌 사람한테 들이대긴 좀 그렇잖아요. 당신은 간혹 내가 자네 아내 아닌 것처럼 굴어 하고 답하지만, 우리 관계가 그런 식이 아닌 걸 내가 가장 잘 알겁니다. 이제와선 당신 남편 자리에 지원한 데에 내 사심이 없었는지도 잘 모르겠어서 그저 낯부끄럽기만 합니다. 아마 없었을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객관적으로도 그럴만한 인선이지 않았습니까? 정말 모르겠네…….
…그래요. 그래서 돌고 돌아 본론인데. 오늘따라 달이 밝아서, 미치지 않고서야 누군가의 기습은 없을테고 별안간에 사람이 죽어날 일도 없을테고, …또 그런 것과 전혀 상관 없이, 별은 옅지만 그 밝은 달이 제법 아름답고 심중에 꽂혀서, 저기 둥그렇고 은은하고 하얗게, 덩그러니 맑고 고고하게, 별 수 없이 선명하게 새겨진 걸 보니 당신 생각이 나서. 당신 있는 곳에서도 저렇게 아름답게 보일까 싶어서. …달 보자고 불러내었으면 나와주었을까 싶어서. 그래서 시작한 편지긴 한데.
나와줄겁니까? 같이 좀 걸을까요.
당신의 마티아.당신 ㅁ
바스티온.
그것이 바람과 파도가 너그러이 들끓는 와중에 날아간 것인지 날려보내진 것인지는 알 수 없고, 이든 로잘리 블레이크에게 도달한 편지는 겨우 이렇다.
로잘리. XX월 XX일의 달이 밝습니다. 오늘은 하늘 보셨습니까?
바스티온.
'1차 > 바스티온 M. 핸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스티온 M. 블레이크 (0) | 2023.09.29 |
---|---|
어떤 가정인데…, (0) | 2023.09.23 |
To. 플린 R. 다이어 (0) | 2023.09.01 |
불사와 필생의 간극 (2) (0) | 2023.08.22 |
…그렇게 됐어 (0) | 2023.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