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ro
불사와 필생의 간극 (2) 본문
불사와 필생의 간극 (1)
꿈을 꾸거든 견디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것들은 보통 그를 죽이지 못하고 어떤 고통들과 다르게 그를 성장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바스티온 핸즈가 악몽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이러하다. 수면에도 하등 도움 안 되고 그러나 간혹은 그리워 더욱 괴로운 것.
망령된 소리가 들릴 때 믿음 없이 십자가를 들지 말라.
낮의 볕이 길게 늘어진다. 사람도 따라서 늘어진다. 바스티온은 걸음 곁을 스치는 그늘 안에 우그러든 사람들을 본다. 걸음을 늦추지는 않는다. 목적지가 명확하면 걸음이 흔들릴 일이 없었다. 이번에는 옛 전우의 집이다. 매번 전하는 약이 이번에는 난데없는 컨디션 난조로 밀린 탓에, 도무지 우편을 통해서는 전달할 수 없어 직접 걸음한다. 제조하는 동안에 편지가 두어 번 오갔으니 언질 없이 늦은 건 아니다. 언제가 편한데요? 조만간에 반차 낼거다. 그 땐 쉬어야지 뭔 소리야…. 그 날 집에 있어라. 실상 편지라기엔 쪽지에 가깝기는 했다. 튀어나온 다리 하나를 아슬하게 스쳐 넘는다. 그러느라 잠시 돌아본다. 지나려다가, 그러지는 못하고 멈춰선다.
“이봐.”
조금 더 크게,
“일어나. 낮술 했나?”
“아니….”
“술을 됫박으로 퍼먹었군. 그러다 다리 잘린다. 열사병만 안 걸리면 다야?”
내버려둬…. 하고 웅얼이는 소리는 쉽게 무시한다. 어깨에 견장 대신 남자를 짊어지고 일어난다. 몇몇이 웅크려 있는 곳에 사내를 적당히 구겨넣고서야 손을 턴다. 다시, 햇빛에 익은 다리에 물에 적신 천을 얹고, 술에 절은 목구멍에 남은 물을 들이붓는다. 물 한 컵 값을 조금 더 쳐 준 후에 가게를 완전히 떠난다.
“늦었네요.”
“너 때문이야.”
“또 뭐야? 제정신인가 이거….”
왜 시비예요. 그런 대화는 쉬울 정도의 친분이다. 문간에서 약 봉투를 건네는 손을 쥐어 잡힌다. 디딘 실내는 이변 없이 따스하다. 소금기가 덜어지고 달큰한 향이 머문다. 풀의 내음이 난다. 이리저리 놓인 소품들이 사람 사는 티를 냈다. 몸 가누기 힘든 사람마냥 끌려가며 견장도 없는 어깨에 얹힌 것처럼 발을 끈다. 끼이익 탁. 끼이익, 탁. 끼이익…. “도대체 이 바닥은 언제 고치기로 한거야?” 식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술이나 차 대신 당연하게 물을 내어온다.
“돈이 썩어나는 줄 아세요? 이 사람 참. 약 주고, 그거 마시고, 가세요.”
“끌어들여놓고 왜 이렇게 매정하게 굴지?”
“어쭈?”
“어쭈?”
“어어?”
바짝 들린 눈과 마주친다. 따스하고 차분한, 노을을 닮은 주홍빛이다.
“이 사람 오늘 왜 이러지? 좀 봐요.”
“아, 그만. 손 떼라.”
스스럼없이 얼굴을 짚는다. 모자는 진작 뺏겼다. 쏟아진 빛에 찡그린 눈꺼풀을 당겨 올리고, 눈 밑에 짙게 낀 어둠을 훑고, 까슬해지려는 턱을 쓸어내다가 거친 손은 멈춘다. 몸을 다시 물린다.
“손 떼라고 했지.”
“요즘 일이 좀 많아요?”
“일은 원래 많아. 모자도 내놔라.”
“밤 샜어요? 차라도 줄까요?”
“모자 내놓으라고.”
“캐모마일?”
그래. 원래 사람마다 재난같은 상대가 있는 법이다. 찬장을 뒤지는 걸 보다가 몸을 일으킨다. 앉으세요, 하면 근처의 벽에 몸을 기댄다. 모자는 이미 한 번에 손 닿지 않을 찬장 위에 있다. 악력이 세졌군. 원래 몸이란 게 그런 법이지. 안 쓰는 곳이 생기면 보충하듯이. 그러다 부러진 돛대를 떠올리고 눈을 끌어 굴린다. 벽과 바닥의 줄눈을 세고 그릇의 쌓인 모양새와 개수를 살피면 그 위로 시선이 스친다. “또 아~무 생각 없는 눈 하네.” 다른 주전자에서 달이기 시작한 약 냄새가 스몄다. 약초의 쌉싸름하고 달큰한 냄새. 아교를 닮은 연고의 냄새. 안정을 위한 차 냄새. 따르지도 않은 술과 소독약의 알콜 향. 끼이익, 탁. 끼이익….
“그럼 내가 생각을….”
서두를 뱉으며 이미 후회할 것을 안다. 입 안에 고이고 끝날 것을 밀어내는 건 밀린 잠, 최근에 훑은 과거의 기록, 헛디뎌 끊을 뻔 한 남의 발목, 더운 날씨, 내리쬐는 햇빛, 약 냄새, 달리 디뎌 불규칙하게 삐걱이는 마루, 짜증스러운 숨결, 거스러미, 거스러미, 거스러미, 거스러미…. 혀 안에 돋은 바늘. 토해낸다.
“은 나침반들과 붉은 바다, 짜고 독한 철분 냄새. 화약 가루. 기침으로 헛디뎌 끊긴 자네 발목 같은 걸 오래 생각해야 하겠나?”
얼굴을 보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물론 두려운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나. 네가 군을 떠난 이후로는 그렇잖아. 우리가 얼굴을 보려면 용건을 편지나 소포로 끝내지 않고, 얼굴 마주할 생각을 하고, 용기를 낸, 내가 찾아오거나.
“아니면,”
혹은 네가 나를 배려하지 않고. 준비되지 않은 나를 찾아오거나.
“아니면….”
그래야한다는 게 문제일텐데. 그도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야? 아니면 혹여 그 모두가 문제인가? 그러면 결국엔 너와 내가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하기에 이 사단이 난다는 말이잖나. 결국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아닌가….
“그러지 않는 게 나아.”
“어이고, 이봐요.”
“자네와 달리 나는 아직 군인이니까.”
묻지 않은 이유를 답한다.
“매년 여름 축제가 열려. 매년 여름. 1년 주기야. 그것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지. 비무장 상태로 널려있을 시기가 없단 뜻이다.”
“나가지 않으면 될 일이에요.”
“내가 없는 전장에서 누가 죽어나갈 지 가늠하는 게 가장 어렵다.”
“무서운 거겠죠.”
기가 차다는 한숨이 떨어진다. 쨍, 소리를 내며 놓인 찻잔에 향긋하게 폐부를 찌르는 차가 찬다.
“그런 생각을 못하겠으면 힘들다고 우는 소리라도 해요.”
“충고 고맙군.”
“허투루 듣지 마시고요. 댁 얼굴 좀 봐요!”
“이봐. 니키.”
또 무게 잡네. 미진한 열기를 지닌 주홍빛 눈이 시선을 맞추려 했다. 모자 없이는 그놈의 고개가 쉽게도 수그러들어 쉽지 않다. 라파엘라 씩이나 되어 이 다리를 하고 바닥에 꿇어앉으라는 요구는 아니렷다. 그럼 꼴에 나랑 눈 마주치기 싫거나, 무섭거나, 쫄리거나, 본인 할 말이 그리 좋은 소리가 아니란 걸 알고는 있다는 건데. 그럼 그만둬야 할 거 아닌가? 설마 기어코 하겠어? 기어코 하겠냐고. 설마. 설마하니…. 이 새끼는 할 법도 해. 야. 여기 봐. 집어든 설탕 통으로 식탁을 두드린다.
“하지 마세요.”
썩은 라임같은 눈빛이 기어코 닿지 않기에, 친절하게도 그의 시선 끝까지 삿대질을 옮겨다 둔다.
“제가 지금 존대 해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 마십쇼.”
“그만 두게.”
이게 진짜.
“나는 오래 전부터 자네를 군인 대우 하지 않으니까.”
“개자식….”
짓씹은 욕설 뒤에 휘두른 손은 멱살 대신 허공을 스친다. 다음에는 목발을 쥔다. 의자 끄는 소리가 요란하다. 엄폐를 놓으시겠다. 저 작자가 진실로 미친건가?
“내가 늘 말하잖아. 너한테 어리광 부릴 수 없다고.”
“내가 매번 말했지! 그런 건 어리광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라고. 이거 안 치워?”
“네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아직 내가 꼴보기 싫지 않기 때문이야. 아니, 니키. 이건 추측이나 비관이 아니니 새겨들어. 내가 하는 게 적선이 아니라는 데에 동의할 수 있는 이유도 네가 비관적이지 않은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야!! 이게 진짜 미쳤나. 언제 왔어? 놔 봐, 여보. 저 새끼 머리에 홈이라도 파야 속이 시원할 것 같으니까.”
“내가 자네보다 멍청하고 한심한 꼴로 살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고.”
아아악! 소리라도 내지르면 속이 편할까? 그러니까 너는 지금 내 행동이 연민으로 보인다 이거야? 네가 잘 살면 내가 속 뒤집어져서 다시는 못 일어나기라도 할 것 같단거냐고. 열에 뻗친 소리가 발버둥과 더불어 제지된다. 등 뒤에서 뻗어나와 당겨 안은 팔은 단단하고 손에는 조금, 화가 담겨있다. 니콜라이는 입을 다문다.
“핸즈.”
“그리고,”
“핸즈 원사.”
호명은 열린 입을 틀어막으며 이어진다.
“남편 속 작작 긁고 입 다물어.”
“명령입니까?”
“부탁.”
“흠.”
“명령으로 해. 지겨운 자식….”
발버둥이 잦아들면 부엌은 잠시 소강 상태에 들어간다. 의자는 조용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캐모마일 차는 속에 불이 붙은 아일라의 입 안으로 쏟아진다. 그는 남편의 옆 자리에 앉아 바스티온을 노려본다.
“이 멍청이들은 왜 해가 지나도 똑같을까? 현역 때처럼 바다에 몇 번 담구면 잡생각이 싹 사라질텐데.”
“저 골 빈 놈이 해군이랑 결혼해서 매일 출근 보조하는 나한테 지 꼬라지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는지 들었잖아.”
“흘려 들으라니까. 군대에 묶여서 다른 건 보지도 못하고 친구는 너 하나밖에 없어서 자기 놓지 말아달라고 엉엉 우는 중이잖아.”
기분을 풀어주는 건지, 푸는 건지 말은 그다지 필터를 거치지 않고 나온다. 다시 보면, 바스티온 핸즈 원사는 얌전히 손을 모아 쥐고 서 있다. 기가 찬 소리가 한숨으로 쏟아졌다.
“답답한 새끼…. 꼴에 명령 받았답시고 이런 소리 듣고도 입 다물고 있는 거 봐. 저런 게 오늘따라 왜 개소리가 길었지? 너는 저런 모지리랑 싸우니까 속이 시원하냐?”
“자기야 왜 나한테 불똥이 튀어?”
“그럼 싸움은 혼자 해? 잘났다 잘났어.”
거침없는 손길이 남편의 등짝 위로 쏟아진다. 맹물이 든 잔도 깔끔하게 비우고 중위가 혀를 찬다.
“말해두는데 난 몰라. 부하 인생에 말 얹기 싫어.”
“….”
“….”
“….”
“아오, 말 해, 말 해!”
냅다 설탕 통이 날아든다. 동기들에게 금방 폭력을 휘두르는 게 아일라 중위의 나쁜 습관이다. 바스티온은 그걸 지적하지 않고 손을 들어 올린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그걸 왜 쳐맞아?”
“맞으라고 던지신 것 같길래.”
“작작 해라 진짜….”
바닥에 떨어져 박살나기 전에 받아든 설탕 통을 식탁 위의 자리에 되돌려놓았다. 통의 윗부분을 매만지다가 돌아선다. 찬장 위에 놓인 모자를 뒤집어 쓴다. 조금 부었을 이마를 가리고 제복에 조금 떨어진 흰 가루를 털면 말끔하다. 입을 뗀다. 침묵이 흐른다. 사과가 채 입 밖으로 쏟아지지 못한다. 대신에 그는 말한다.
“저녁 시간 다 된 것 같으니 가겠다.”
“뭐?”
“가겠다고.”
“내가 지금 그거 못 들어서 물어본 것 같냐? 앉아.”
“신혼에 얹혀 밥 먹을 정도로 눈치 없지 않다.”
7년! 아일라는 이 새끼한테 신혼의 기준인 7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그럴 리 없다는 결론에 닿는다. 저 성실하고 뻔뻔한 낯으로 쌩구라를 치는 게 한 두 번이야? 동기이자 한 때는 부하였던 둘이 얌전히 눈을 깔아내렸다. 화가 슬금슬금 치미는 걸 못 알아볼 일이 없다. 바스티온은 오늘 아일라의 짜증이나 화를 돋우는 일이 많았으리라 추측하고, 니콜라이는 그 원인이 전부 바스티온이리라는 확신도 더불어 한다. 노호성이 쏟아진다.
“남이 널 답답해하는 게 보기 좋아? 이해 못 받는 게 특별한 것 같고 그래? 그렇게 곪고 썩어가면 누가 신경 써주니까 더 그러는거냐고. 나랑 얘가 널 아끼는 게 아주 우스워? 대답, 핸즈… 아니, 취소.”
배회하던 눈동자를 꼭 대답이라도 할 것처럼 끌어올리는 꼴에 다시 화가 치솟는다. 취소와 동시에 떨어져내리는 거엔 더 그렇다. 개자식, 답답하고 꽉막힌 벽창호 새끼. 물에 담그면 폐부터 가라앉을 작자. 그 비슷한 쌍욕들이 몇 개 지났다.
“야. 되는대로 뱉으면 그게 다 말이야? 대가리가 가득 차서 다른 생각을 못하는 건 알겠는데 대화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뱉을 땐 생각을 좀 해야 할 거 아냐. 너는….”
삭히느라 씩씩대는 소리가 났다.
“너 외의 모든 사람이 다 멍청해서 공감이라곤 못 할 것 같냐?”
바스티온은 잘못을 통감한다.
“아니.”
그런다고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언제나 이런 문제에서는 많은 것이 제 잘못이었다. 모자 그늘을 끌어내려 그 아래에 숨는다.
“미안하다.”
돌아버릴 것 같아. 뭐가 미안한데, 아일라는 그런 소리도 하지 못하고 그를 보낸다.
저녁 때의 바람은 잔열와 소금기를 아무렇게나 흩어두며 스친다. 신혼집이 보이지 않을 곳까지 걷는다. 맞바람이 너무 거세게만 느껴진다. 걷는다. 계속 걷는다. 그리고 더 이상 걷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멈춘다. 빠르지 않은 심박은 쥐어 짜이며 뛰고 몸 말단에 죄 힘이 들어 저리다. 쥐어짜이는 심장부터 차곡차곡 구겨 접어 아무곳에나 쭈그려 앉고 싶지만 참는다. 마냥 서있을 수 없어 다시 걷는다. 멈출 수 없다. 해가 질 때까지 떠돌아도 채 녹초가 되지 못한 채 귀가하련만. 겨우 잠들거든 현실과 맞닿은 꿈을 꾸리라. 어렵다. 그는 도무지 비무장 상태에 놓일 수 없다. 전쟁 중에는 아니었으나 전쟁 직후부터 그는 계속해서 라파엘라였고 일은 끊이는 법이 없었으며 그 중 반 정도는 사람 몸뚱이를 돌보는 일이었다. 과로하지 않으려면 잘 쉬어야했고 잘 짜인 일과에 그런 공백은 사치다. 그리고 바스티온은 그 모든 게 다 제 억지라는 데에도 동의한다. 전쟁이 끝나고 8년이 다 되어가는 와중에 군은 그렇게까지 급박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생각하거나 숙고 할 시간도 없이 바쁠 정도로 이 조직은 무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쉽게 정신머리를 붙들지 못한다.
그가 잦게 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되짚어 누군가에게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스스로를 용서한 일이 없다. 용서할 일도 없다. 나아질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럴 수는 없으니까. 차라리 이렇게 죽는 것이 옳지 않나. 망각을 후회보다 반가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아지는 과정을 견뎌나갈 자신이 도무지 없다. 그렇게 평생을 감각이 선명하지 못 한 꿈결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나. 현실을 견디지 않은채로. 그걸 마주할 일 없이. 차라리 뭍에서 바다를 기리며 살아가는 것은 어렵나. 망령되게 십자가를 찾지 않을테니….
그러므로 바스티온의 침묵은 만성적인 습관과 스스로에 대한 몰이해의 결과이자 이유다. 어느 순간 이해받기 포기한 것을 알았다. 거절당하는 게 두려운 건 아니다. 저를 알지 못하는 탓에 남도 알기 어려워, 깊게 관계 맺거든 그 속이 들통나 쓸모없는 소리나 늘어놓고 그게 모르는 새에 상대를 해치고 망칠까봐. 그래서 그는 쉽게 침묵을 고르고 간단히 사람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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